지독한 하루 속, 누군가의 이마에 손을 얹는 마음

효율보다 온기, 멈춰 서서 마음을 느낄 때

효율보다 멈춤이 필요한 순간

응급의학과 의사 남궁인의 『지독한 하루』

▲ 지독한 하루, 남궁인 지음 [사진=박성심 칼럼니스트]

 

역할이 바뀐 우리: 시간에 담긴 불안

“아빠, 여기 앉아 계세요. 어디 가지 말고요.” 아버지를 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혀두고 급히 약국으로 향했다. 이제 아버지는 내 걸음을 따라오지 못하신다. 나는 혼자 빠르게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졌고, 솔직히 그 편이 편하다.

 

한참을 걷다 뒤를 돌아보았는데, 혼자 남겨진 아버지를 보자, 어릴 적 버스 터미널 대합실이 떠올랐다. “여기 앉아 있어. 아빠 금방 올게. 절대 다른 데 가지 마.” 그때의 나는 아버지를 기다리던 아이였다. 십 분 남짓한 시간이 두려움으로 길게 느껴졌다. ‘나를 두고 가버린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생생하다.

 

시간의 흐름은 그렇게 우리의 자리를 바꾸어 놓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서울의 풍경이 낯설고, 사람들의 속도가 벅찬 아버지가 이제는 그저 나를 기다리신다.

 

같은 사람으로 다가가는 마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신체적 불편뿐 아니라, '오래 걸리는 환자'라는 시선을 받는 일이기도 하다 “그 나이에 아픈 건 당연하다”는 무심한 말 속에서, 아버지는 그저 수많은 환자 중 한 명이 된다.

 

하지만 내게 아버지는 단 한 사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다. 병원 복도 의자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니 가슴이 저릿했다. ‘우리 아버지가 단순한 환자가 아닌, 한 사람의 위대한 존재로 인식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일었다.

 

응급의학과 의사 남궁인의 『지독한 하루』에 담긴 한 장면은 이 간절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교수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픈 아이를 보자, 망설임 없이 다가가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단순히 체온을 재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는 아이의 머리를 감싸 쥔 채 잠시 마음을 재듯 온기를 나누었다. “열은 없는데, 많이 골골대나요?” 그 짧은 진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의대생은 훗날 의사가 되어 환자에게 습관처럼 이마에 손을 얹는다. 

 

환자의 이마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두 사람을 이어준다. ‘환자’와 ‘의사’가 아니라, 같은 사람으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방금 자신의 체온을 나누어가진 사람을 미워할 수 있을까. 지금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온기를 나누어 받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이마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단순한 돌봄이 아니라, 그를 대상이 아닌 온전한 인격체로 바라보는 태도다. 그 마음이야말로 진짜 위로의 시작이다.

 

효율보다 멈춤이 필요한 순간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마음을 건네는 사람인가, 아니면 빠르게 지나치는 효율적인 사람인가. 효율과 속도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일을 빨리 처리하고 결과를 중시하는 것이 능력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눈을 맞추는 일, 안부를 묻는 일 같은 중요한 연결을 잃어가고 있다.

 

응급실의 ‘지독한 하루’ 속에서도 남궁인 의사는 ‘만약’이라는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다고 말한다. “‘만약’은 없다. ‘만약’이 없을 수 있게, 도저히 생각조차 나지 않아 내가 내뱉을 말에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 일이다.”

 

우리의 일상도 다르지 않다. ‘나중에 연락해야지’, ‘다음에 만나서 말해야지’, ‘그때 더 잘해줄 걸’… 우리는 수많은 ‘만약’을 만든다. 하지만 그 ‘만약’이 생기기 전에, 지금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제가 할게요, 그냥 앉아 계세요” 대신 “같이 가요. 천천히 가도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것. 미루지 않고 지금 바로 안부를 전하는 것. 완벽한 말을 찾으려 하지 말고, 짧은 메시지라도 마음을 전하는 것.

 

아버지는 예전처럼 빠르게 걷지 못하시고, 귀가 어두워 여러 번 되물으시지만, 이 모든 것이 전혀 부담되지 않는다. 이렇게라도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하다.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는 그런 소중한 사람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선물

이 지독한 하루 속에서도, 우리는 잠시 속도를 늦추고 온기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의 이마에 손을 얹는 것 같은 따뜻한 마음으로, 지금 우리 삶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조금 더 다가가 보자. 

 

완벽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만약 그랬다면’이라는 후회는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사람으로 다가서는 마음, 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선물이 아닐까?

 

 ‘보통의가치’ 뉴스는 작은 일상을 기록하며, 우리 사회가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치를 전하고 있습니다

작성 2025.10.14 20:29 수정 2025.10.14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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