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관습도감(慣習都鑑)을 두어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제례(祭禮) 때 사용하는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雅樂)을 정리하여 향악(鄕樂)과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또 편경(編磬)과 편종(編鐘) 같은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정간보(井間譜: 옛날 악보)를 통해 이 음악을 기록하게 하였다. 당시 편경은 쇠나 흙으로 만들어져 소리가 고르지 못하고 음을 제대로 조율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는데 서기1430년(세종 12년)에 새로만든 편경과 편종은 날씨나 온도가 변해도 형태가 바뀌지 않는 돌의 속성을 이용하여 고른 소리를 내게 하였다.
세종 때는 또 직접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정인지, 권제(權踶)의 『용비어천가』, 정초와 변계문(卞季文)의 『농사직설』, 정인지와 김종서의 『고려사』, 설순(楔循)의 『삼강행실도』, 윤회(尹淮)와 신장(申檣)의 『팔도지리지』, 이석형(李石亨)의 『치평요람』, 수양대군의 『석보상절』, 김순의(金循義)와 최윤(崔潤) 등의 『의방유취』 등, 각 분야의 서적도 편찬되었다. 동시에 농업과 양잠에 관한 서적들도 간행하고 환곡법의 철저한 실시와 조선통보의 주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공정한 전제(田制제도의 확립 등으로 경제생활의 향상에도 전력했다.
서기1421년(세종 3년)에는 농한기를 이용하여 전국에서 322,460명의 역군을 동원하여 허물어진 성곽을 보수하고 기존의 토성은 석성(石城)으로 쌓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무너진 28,487척(尺)을 수축했다. 하지만 추운 겨울에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되었으므로 부상자도 속출하고 도망자도 발생하였다. 정부는 공사 인부들을 치료하기 위해 4곳의 진료소를 설치하는 한편, 성을 쌓다 도망가는 자는 초범자는 곤장 1백 대를 치고, 재범자는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그 밖에도 형벌 제도를 정비하고 흠휼(欽恤: 죄(罪)를 신중 심의) 정책도 시행하였다. 서기1439년(세종 21년), 양옥(凉獄), 온옥(溫獄), 남옥(男獄), 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하였고, 서기1448년(세종 30년)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 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諭示: 국민을 타일러 가르침)하기도 하였다.
이런 정책과 함께 세종은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시를 내렸다고 한다. “노비는 비록 천민이긴 하지만 하늘이 낸 백성임이 틀림없으니 신하된 자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도 만족할 일인데,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가하여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임금된 자는 덕(德)을 살리기 좋아해야 하는데, 무고한 백성들이 많이 죽는 것을 보고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금하지도 않고 그 주인을 치켜올리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이 밖에도 노인들을 우대하여, 쌀과 의복을 내려 구휼하였고 때로는 양로연(養老宴)을 열어 노인들을 위로하였다. 승정원에서는 양로연에 초대받은 노인 중, 천민의 참석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며 상소를 올렸으나, 세종은 “양로(養老)하는 까닭은 그 늙은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지, 그 높고 낮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 비록 지천(至賤)한 사람이라도 모두 들어와서 참례하게 하라.”고 일갈하며 노인의 신분에 관계없이 죄를 지은 자가 아니면 모두 참석하도록 지시하였다.
세종은 즉위한 후 7년이 넘는 동안 계속 가뭄이 들었는데, 이를 백성들은 “세종 대한(大旱)”이라고 불렀다. 세종은 가뭄이 심하게 들어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임금이 기와집에서 잘 수 없다고 하며 백성들과 고통을 같이 하기 위해 경회루 옆에 초가집을 짓도록 명령했다. 신하들은 화재와 안전, 건강 등의 문제를 들며 반대하였지만 세종은 오히려 경복궁에 있는 낡은 자재를 재활용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초가집이 지어지자, 세종은 2년 3개월 동안 그 초가집에서 거주하며 업무를 진행했다. 신하들이 세종을 위해 다른 가구들을 추가로 설치했지만, 오히려 “내가 명한 것이 아니면 작은 물건 하나라도 이 안에 들이지 말라”고 하며 조금이라도 사치스러운 삶을 거부하였다.
세종은 말년에 들면서 불교에 대한 태도가 크게 변했다. 세종 26년에는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그 이듬해에는 아홉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 세종 28년에는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연이어 잃게 됨에 따라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왕 자신의 건강이 악화된 것도 세종이 불교로 기우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결과 세종 말년에는 세종과 유신(儒臣)들 간에 불교를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과 논란이 계속되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은 개국 초부터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시행했으나, 유교는 정치이념, 학문, 철학, 윤리적인 면의 욕구를 채워주었을 뿐, 종교적인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세종은 그렇게 병약해진 결과 서기1450년 3월 30일, 붕어하셨다. 세종(世宗)의 능(陵)은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와 합장된 영릉(英陵)으로서 경기도(京畿道) 광주(廣州)에 있었던 것을 예종(睿宗) 원년(서기1469년)에 현재의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으로 옮겼다. 시호(諡號)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고, 묘호(墓號)는 세종(世宗)이다.
-손 영일 컬럼


















